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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나눔터/특별한보통사람들

아주 특별한 보통 사람들

by Dream Planner 2012. 12. 20.


아주 특별한 

보통 사람들




인천 <민들레 국수집> 서영남 수사님은 제가 참 많이 존경하는 어르신입니다.  2년전 봄에 인간극장을 통해 수사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사랑과 정성으로 돌보시는 그분의 행보에 대해 많은 감동을 받았고, 마침 그해 가을 남편과 한국에 방문하였을 때 직접 찾아가 뵙기도 하였습니다.  정부보조 없이 100% 자원봉사의 힘으로 하루 몇 백명의 노숙자들에게 손수 밥 지어 주시고 다방면으로 그들의 생활향상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신 수사님.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상적인 사회, 그 유토피아를 느끼고 싶어 직접 찾아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수사님과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의 기운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됩니다.  그 순간 저는 얼음, 땡 게임을 하는 어린아이처럼 순식간에 갑자기 '얼음'이 되어 버렸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그냥 멈춰 버린듯한 순간이였습니다.  "어서 들어와 밥부터 드세요," 수사님의 첫 말씀에 '땡'하고 마법아닌 마법에서 풀리게 되었습니다.  수사님의 삶을 통해 배운 인생레슨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사춘기 10대부터 가슴에 묻어 두었던 궁금하고 답답한 질문들이 엉킨 실타레 풀리듯 해결되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냥 바라보고 있으면 전해지는 감동이 너무 크고 진해서 내 가슴 속 깊은곳에서부터 맘이 새롭게 정화되는 것 같습니다.  멀리 살아서 찾아가 뵙기 힘들지만, 자주 홈페이지에 방문해 좋은 에너지를 공급받습니다.  다음은 수사님의 홈페이지에서 퍼온 글 입니다.  한 해가 지는 이 시점에 자신을 돌아보며 새해를 새롭게 기약하는데 아주 좋은 감동의 글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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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에 ‘범인’이 잡혔다. “나 혼자 여러 해 동안 소금을 나르다 보니 힘이 들어서” 읍사무소에 맡기겠다고 소금을 트럭에 싣고 그가 자수했다.

이름은 강경환(50). 충남 서산 대산읍 영탑리에서 부성염전이라는 소금밭을 짓는 소금장수다. 그런데 보니, 그는 두 손이 없는 장애인이 아닌가. 손 없이 염전을? 또 서류를 살펴보니 그는 7년 전까지 그 자신이 기초생활수급자였던 빈한한 사람이 아닌가.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쁜 사내가 남을 돕는다.


지뢰 가지고 놀다가 두 손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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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장수 강경환은 사건이 발생한 연월일시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1972년 12월 24일 오전 9시 40분. 1959년생인 강경환이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방학을 맞은 6학년, 나이는 13세였다.

서산 벌말에 살던 강경환은 해변에서 ‘안티푸라민’ 통을 닮은 깡통을 발견했다. 나비처럼 생긴 철사가 있길래 그걸 떼내 가지고 놀겠다는 생각에 돌로 깡통을 두드려댔다. 순간 앞이 번쩍하더니 참혹한 현실이 펼쳐졌다. 안티푸라민이 아니라 전쟁 때 묻어놓은 대인지뢰, 속칭 발목지뢰였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떠보니까 가스 땜에 목은 칼칼하고, 눈이 안 보이는 겁니다. 화약이 지금도 눈가에 들어가 있어요. 앞은 이글이글하지, 손을 보니까 손가락이 늘어지고 막 타서….” 폭발음에 놀란 마을 사람들이 집으로 달려와 경환을 업고 병원으로 갔다. 사흘 뒤 깨어나 보니 손목 아래 두 손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 되었다, 노래 잘해서 가수가 꿈이었던 소년의 인생이 엉망진창이 된 것은.

500미터 거리인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른다. 나중에 마을 어른들이 그랬다. “바다에서 집 사이에 폭 3미터짜리 웅덩이가 있었는데, 너가 어떻게 그걸 뛰어넘고 왔는지.” 신비한 일은 또 있다. “기절해 있는데, 어머니가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내 이름을 부르면서 달려오는 거예요. 그래서 깨어나서 집으로 달려간 거요.”


절망의 나날을 술로 보내다


피를 너무 흘려서 죽었다고 생각했던 소년이 살아났다. 하지만 “남 보기 부끄러워서” 중학교는 가지 않았다. 대신에 그 뒤로 3년 동안 경환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어머니가 밥 먹여주고, 소변 뉘어주며 살았다고 했다. 소년은 고등학교 갈 나이가 되도록 그리 살았다. 인생, 포기했다. “어느날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어요. 어머니가 친정에 가셨는데, 오시질 않는 겁니다. 배는 고프지… 결국 내가 수저질을 해서 밥을 먹었어요.” 3년만이었다. 석달 동안 숟가락질 연습해서 그 뒤로 스스로 밥을 먹었다.


스스로 밥을 먹고 스스로 혁대를 차게 되었다고 해서 인생이 완전히 바뀐 건 아니었다. “모든 게 귀찮아서 농약 먹고 죽으려고 한 것만 두 번”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뒤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실패했다. 대신에 그는 “열일곱 살 때부터 주막에 출근했다”고 말했다. “모든 게 귀찮았어요. 술로 살았죠. 괴로우니까. 아침 10시에 출근해서 밤 12시에 퇴근했어요. 주막에 친구들이 많이 있으니까, 가서 그런 거나 먹고 살았죠.”


손을 잃은 대신 사랑을 얻다


그날도 술을 처먹고 집에 온 밤이었다. 책상에 유인물이 하나 있길래 무심코 봤다가 휙 던져버렸다. “아침에 유인물을 보니까 정근자씨라고, 팔 둘이랑 다리 하나가 없는 사람이 교회에서 강의를 한다는 거예요. 가서 들었죠. 야, 저런 사람도 사는데, 나는 그 반도 아닌데, 이 사람같이 못 살라는 법 없지 않나….”

강경환은 편지를 썼다. “나도 당신처럼 잘 살 수 있나.” 답장이 왔다. 너도 나처럼 잘 살 수 있다고. 아주아주 훗날이 된 지금, 강경환은 이렇게 말한다. “손이 있었다면 그 손으로 나쁜 짓을 하고 살았을 거 같다”고. 그래서 “손이 없는 대신에 사랑을 알게 되고 마음의 변화를 갖게 되고, 새롭게 살게 되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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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 강경환은 훌륭하게 그 방법을 찾아냈다. 술을 끊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삽질을 익히고, 오른쪽 손목에 낫을 테이프로 감고서 낫질을 하며 아버지 농사일을 도왔다. 농사랬자 일곱 마지기. 식량 하고 나니 남는 게 없었다. 지독하게 가난한 집. 1994년, 아버지 친구가 그에게 물었다. 너 염전 할 수 있겠냐.

이미 1987년 교회에서 사랑을 만나 결혼한 가장이었다. 하겠다고 했다.


피눈물 나는 삶이 시작됐다. 농사 짓는 삽보다 훨씬 무겁고 큰 삽을 ‘손 몽둥이’로 놀리는 방법을 익혔다. 수레에 싣는 소금은 양이 훨씬 적었다. 정상인만큼 일하기 위해 밤 9시까지 염전에 물을 대고, 새벽까지 소금을 펐다. 하루 2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했지만 그래도 남의 몇분의 일만큼도 일을 하지 못했다. “노력도 노력이지만, 인내라는 게 그리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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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1996년 그 와중에 그의 머리 속에 남을 돕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으니, 손을 잃은 대신에 얻은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소금 한 포대가 1만원 가량 하는데, 여기에서 1000원을 떼서 모았죠. 그걸로 소금을 저보다 불행한 사람들에게 주는 겁니다.”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올해까지 14년째다. 한달 월급 받고선 고된 일 마다하고 도망가 버리는 직원들 대신에 부부가 직접 염전을 지으며 실천하고 있는 일이다. 아산의 한 복지단체를 통해 소록도에 김장용 소금을 30포대씩 보내는 것도 빠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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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환의 ‘부성염전’은 1만2000평. 한해 소출이 6000만원 정도다. 이거저거 비용을 빼면 순수입은 한해에 1800만원 정도라고 했다. 뭐, 1800만원? 거기에서 10%인 200만원은 꼬박꼬박 남을 위해 쓰고 있으니 이게 어디 사람의 삶이 맞긴 맞나. 작년에는 400만원 정도 되더라고 했다.

강경환이 말했다. “조금만 마음을 가지면 되는 겁디다. 소금 한 포대 팔아서 1000원 떼면, 5000포대면 500만원이잖아요. 하나를 주면 그게 두 개가 돼서 돌아오고, 그 두 개를 나누면 그게 네 개가 되어서 또 나눠져요. 연결에 연결, 그게 사는 원리지요.”

그 나눔과 연결의 원리에 충실한 결과, 2001년 그는 지긋지긋한 기초생활수급자 꼬리표를 뗐다. 작지만 아파트도 하나 장만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시청으로 가서 자발적으로 기초생활수급자 신분을 포기했다. 수급자 수당 30만원이 날아갔다. 장애인 수당도 포기했다. 6만원이 또 날아갔다. “나는 살 수 있는 길이 어느 정도 닦아졌으니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 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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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전히 그는 어렵다. 염전도 남의 염전을 소작하고 있고, 여고생인 둘째딸 학비도 버겁다. 가난한 사춘기 때 손 잃은 서러움과 방황하던 청년기를 일거에 날려버린 종교적인 깨우침이, 여전히 가난한 그에게 이른다. 손을 내밀라고, 보이지 않는 사랑의 손을 내밀라고.


장엄한 부부, 소금밭을 가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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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는 ‘밀알’이라는 자선단체를 만들었다. 혼자서 하기에는 버거운 일. 그래서 마음 맞는 사람들을 모아서 불우한 사람들을 더 도우려고. 꿈? 거창하다. “한 30억원 정도 모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마음놓고 남 도울 수 있잖아요. 지금은 형편이 이래서 돕고 싶어도 어렵고….”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말했다. “내가 악처죠. 내가 악처가 아니고 저 사람만 믿고 있으면 큰일 나요, 큰일.” 남편이 웃으며 말을 받는다. “우리 식구가 천사에요 천사.”


맑은 날이었다. 부부가 소금밭에 나가서 소금을 거두는데, 손 없는 남편이 능숙하고 진지한 몸짓으로 소금을 모으면 아내는 얌전하게 삽으로 밀대에 소금을 담고, 그 밀대를 ‘손몽둥이’로 남편이 밀어 소금창고로 가져가는 것이다. 그 모습, 장엄(莊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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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경환씨네 부성염전은 전국에서 택배로도 주문을 받는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으나, 택배비를 포함해서 30킬로그램 들이에 1만5000원이 되지 않는다. 그 가운데 10%는 항상 소록도를 비롯해 서산 등지의 어려운 손으로 간다.

강경환님은 2011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받으실 분입니다. 지난 해 기사를 퍼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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